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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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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일자
2021-04-20
◀ANC▶
사북항쟁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성고문 피해를 입은
광부 아내들의 실제 증언을
어제 보도해 드렸습니다.
당시 계엄사 수사단은 부녀자들에게
잔혹하게 성고문하고, 인권을 유린했는데요.
일부 부녀자는 모진 고초를 겪은 뒤
후유증으로 아이를 잃고,
가정과 이웃으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습니다.
조규한 기잡니다.
◀END▶
◀VCR▶
1980년 사북항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엄사 수사단은 한밤 중에
광부 사택으로 들이닥쳤습니다.
광부들은 가족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끌려갔고,
부녀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30-40대의 부녀자들은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INT▶A 씨/ 피해 여성
"곤봉으로 음부 쪽을 팍팍 때리니까, 밤으로는 부어서 막 부어 오르지. 가슴은 얼마나 비틀었는지 가슴도 화끈화끈하고..."
당시 수사단에 끌려간 부녀자는 대략 40-50명,
상당수가 비슷한 성고문 피해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부녀자들은
생리 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INT▶ B 씨 / 피해 여성
"생리가 그냥 파자마 입은 채로 나오는데 피가 질질 나오는데 끌려 나왔다. 끌려 들어왔다 그러는데, 그 주제에 생리도 하고..."
무자비한 폭행에다 성고문까지
온갖 수모를 참아냈지만,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부 부녀자들은 옥살이를 해야 했고,
이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는데
결국 후유증으로 아이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INT▶C 씨 / 피해 여성
"(출소 후에) 뱃속 아이가 7, 8개월이어서, 한 두 달만 기다리면 제대로 낳을 텐데. 애가 충격을 받아서 크지를 못했어. 요만해. 그래 낳아서 하루 칭얼거리더니 그만 없어져 버리더라고. "
여기에다 오랜 시간 고초를 함께 당한 가정도 평온하기 힘들었습니다.
부부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고,
가정에서조차 버림받을까봐 불안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INT▶C 씨 / 피해 여성
"처음에 (남편이) 뭐라고 안했는데, 나중에 되고 나니까, 남남이 되더라고. 남편한테 대우를 못 받고, 인정을 못 받으니까... "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난동을 부린 폭도라는
오명을 쓰고, 이웃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몇몇 가정은 생계 터전을 버리고
광산촌을 아예 떠났습니다.
◀INT▶황인욱/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
"사북사건의 상처는 심하고요. 왜 이렇게 됐는가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40년 동안 응어리졌던 마음을 아무도 풀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사북항쟁 피해자 가족들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왜 인면수심의 만행을 저지르고 사과하지 않는지 묻고 있습니다.
MBC뉴스(영상취재 양성주)
◀END▶
#사북항쟁
사북항쟁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성고문 피해를 입은
광부 아내들의 실제 증언을
어제 보도해 드렸습니다.
당시 계엄사 수사단은 부녀자들에게
잔혹하게 성고문하고, 인권을 유린했는데요.
일부 부녀자는 모진 고초를 겪은 뒤
후유증으로 아이를 잃고,
가정과 이웃으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습니다.
조규한 기잡니다.
◀END▶
◀VCR▶
1980년 사북항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엄사 수사단은 한밤 중에
광부 사택으로 들이닥쳤습니다.
광부들은 가족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끌려갔고,
부녀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30-40대의 부녀자들은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INT▶A 씨/ 피해 여성
"곤봉으로 음부 쪽을 팍팍 때리니까, 밤으로는 부어서 막 부어 오르지. 가슴은 얼마나 비틀었는지 가슴도 화끈화끈하고..."
당시 수사단에 끌려간 부녀자는 대략 40-50명,
상당수가 비슷한 성고문 피해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부녀자들은
생리 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INT▶ B 씨 / 피해 여성
"생리가 그냥 파자마 입은 채로 나오는데 피가 질질 나오는데 끌려 나왔다. 끌려 들어왔다 그러는데, 그 주제에 생리도 하고..."
무자비한 폭행에다 성고문까지
온갖 수모를 참아냈지만,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부 부녀자들은 옥살이를 해야 했고,
이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는데
결국 후유증으로 아이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INT▶C 씨 / 피해 여성
"(출소 후에) 뱃속 아이가 7, 8개월이어서, 한 두 달만 기다리면 제대로 낳을 텐데. 애가 충격을 받아서 크지를 못했어. 요만해. 그래 낳아서 하루 칭얼거리더니 그만 없어져 버리더라고. "
여기에다 오랜 시간 고초를 함께 당한 가정도 평온하기 힘들었습니다.
부부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고,
가정에서조차 버림받을까봐 불안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INT▶C 씨 / 피해 여성
"처음에 (남편이) 뭐라고 안했는데, 나중에 되고 나니까, 남남이 되더라고. 남편한테 대우를 못 받고, 인정을 못 받으니까... "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난동을 부린 폭도라는
오명을 쓰고, 이웃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몇몇 가정은 생계 터전을 버리고
광산촌을 아예 떠났습니다.
◀INT▶황인욱/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
"사북사건의 상처는 심하고요. 왜 이렇게 됐는가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40년 동안 응어리졌던 마음을 아무도 풀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사북항쟁 피해자 가족들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왜 인면수심의 만행을 저지르고 사과하지 않는지 묻고 있습니다.
MBC뉴스(영상취재 양성주)
◀END▶
#사북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