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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꿈꾸는 기자 (발꿈기) - 43회 : 영동지역의 3.1운동 ①-1919

19-02-21 18:4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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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꿈꾸는

기자

 

Chapter 1. 3.1운동 100주년

 

  • <3.1절 노래>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들어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 지금 듣고 있는 이 노래는 ‘3.1절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삼일절 기념식장에서 들으셨다면 독립유공자 후손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지 않다면 어릴 때 학교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하며 부르고 들으셨을 겁니다. 이 노래를 불러본 지 까마득한데도 제가 이 노래를 외우고 있더라고요. 그만큼 많이 부르고 들었단 뜻일 겁니다. 벌써 올해가 삼일절 100주년입니다. 

 

  • 삼일절은 1926년의 6.10 만세운동,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일로 올해로 100년째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신 순국선열들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 우린 3.1운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죠?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의 이미지나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이미지 등을 떠올릴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있는 강원영동지역의 3.1운동에 대해선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요?

 

  • 저는 올해 초부터 영동지역의 3.1운동 관련 책과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며 관련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광복회원, 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들까지 많은 분들을 만나 말씀도 듣고 필요하면 인터뷰도 하고 자료도 빌려 읽었습니다.

 

  • 그런데 한 달 가량 3.1운동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느꼈던 안타까운 점이 너무 많은데요. 우선 영동지역의 3.1운동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료 자체가 부족한데다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았고, 정리하려는 노력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주 발꿈기 시간엔 1919년 3월과 4월의 영동지역을 살펴보고, 다음 주 이 시간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오늘의 관점에서 영동지역을 살펴보겠습니다.

 

Chapter 2. 3.1운동의 국내외 배경

 

  •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조선은 빠르게 식민지화합니다. 헌병경찰제도,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적용하는 ‘조선태형령’, 일정 범위 내의 범죄는 정식 재판 없이 즉결할 수 있도록 한 ‘범죄즉결령’,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교육시키려는 ‘조선교육령’이 잇따라 시행됩니다. 또, 조선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가죠. 여기에 의와 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유교 문화를 빠르게 해체하면서 조선인들의 반발을 키웠고, 무장을 해산당한 조선 군인들이 의병으로 편입되게 됩니다. 훗날 의병들의 활동은 강원도를 포함한 전국 각지의 항일 투쟁에 큰 획을 긋게 됩니다.

 

  • 대외적 배경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신년 연설에서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와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를 들 수 있습니다. 세계의 약소민족들은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 파리강화회의 즈음해서 미국은 특사를 중국에 파견해 미국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중국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이었는데 조선에서 이 내용을 전해들은 이후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데 훗날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에 영향을 주고 국내 3.1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한 천도교 계통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3.1운동의 배경에 대해 강릉문화원 박도식 전임교수에게 들어봤습니다.

 

  • 박도식 강릉문화원 전임교수 인터뷰

“1910년대 무단 통치가 시행되거든요. 그때 ‘태형령’ 이런 것이 행해지고 있고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해서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토지 소유한 것이 인정됨으로써 우리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자 총독부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고조가 되고 있죠. 그런 와중에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게 되는데 이것이 식민지 약소민족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되죠. 원래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런 나라가 해당되는데 우린 해당사항이 없지만 그 영향을 상당히 받았습니다. 최초의 순수 학생운동이자 3.1운동을 촉발시킨 선구적인 운동이 2.8 독립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 각 언론사 이런 데 보내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되죠. 기미독립선언서의 기초가 된다고 볼 수 있죠.”

 

Chapter 3. 3.1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

 

  • 일본에서 벌어진 2.8 독립운동 이후 국내 지도자들은 서둘러 3.1운동을 기획하게 됩니다. 3.1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필요한 모든 자금 지원을 천도교가 맡기로 합니다. 천도교는 동학의 제3대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건데요. 천도교의 최린이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의뢰한 뒤 2월 15일 기독교의 동의까지 얻습니다. 2월 20일부터 비밀리에 인쇄가 시작돼 모두 2만 1천 부가 만들어지고 후에 수개월간 만세운동이 이어지면서 모두 3만 5천 부 가량이 제작됩니다. 당시 인쇄술의 수준을 생각하면 상당한 수칩니다.

 

  •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단이 나눠 비밀리에 배포했는데 전국적으로 서울, 평양, 원산, 개성, 해주, 대구, 마산, 전주, 군산 등에 배포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은 교단별 추천으로 이뤄졌습니다. 천도교가 교주 손병희 등 간부 15명, 기독교가 이승훈 등 16명, 불교가 한용운 등 2명. 이렇게 33명의 민족대표가 각 종교계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선언서 날인은 2월 27일 천도교 오세창, 기독교 함태영, 불교 한용운이 모여서 하게 됩니다.

 

  • 거사일은 많은 인파가 몰릴 고종의 국장일인 3월 3일이 기준이 됐습니다. 하지만 국장일 당일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피했고, 3월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가 반대해 결국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에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합니다. 한편, 서울 탑골공원에서도 학생 대표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벌였고, 같은 날 평양, 의주, 원산 등의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이뤄집니다.

 

Chapter 4. 독립선언서의 의미와 배포

 

  • 숨가쁘게 1919년 3월 1일까지 달려왔습니다. 여기서 강원도의 만세운동을 들여다보기 전에 중요한 포인트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선 독립선언서의 의미입니다. 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를 읽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뒤 가두시위를 벌이는 형태로 벌어졌습니다. 당연히 독립선언서를 읽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먼저 행해져야 하는 일이었던 거죠. 따라서 각 지방에선 ‘독립선언서’를 확보하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2만여 부의 독립선언서를 서울 외에는 어느 지역에 보낼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 중요했을 겁니다. 독립선언서가 제작된 게 2월 하순이기 때문에 거사일인 3월 1일까진 시간이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안도 매우 중요했을 겁니다. 따라서 빠르고,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그 답은 ‘철도’ 말고는 없었다는 거죠.

 

  • 아까 제가 독립선언서 배포의 주요 근거지를 쭉 말씀드렸는데요. 강원도의 경우는 당시 함경도 원산과 원산으로 가는 철로가 주요 독립선언서 배포의 근거지가 됐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강원도니까 강릉이나 원주가 주요 거점이 되지 않고 왜 하필 원산이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독립선언서 배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과 도보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경원선의 종착점인 원산이 중심이 된 건 이 때문입니다. 즉, 철도를 통해 빠르게 원산으로 보내며 중간에 평강을 통해 강원 영서지역으로 확산시킨 뒤 원산에선 북으론 함흥, 남으론 강원영동지역으로 배부하려던 거죠.

 

  • 당시 3.1운동 지도자들이 주요 거점으로 삼은 곳들은 종교지도자들과 학생대표들이 철도를 통해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다른 지역은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여해 독립선언문을 품에 지니고 지역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기반이 됐습니다. 

 

Chapter 5. 1919년 철도망과 경원선

 

  • 1919년 당시 철도망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1899년 인천-노량진간 경인선이 개통됐고, 1905년엔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 간 경부선, 용산-신의주 간 경의선이 개통됐습니다. 1915년엔 용산-원산 간 경원선이 개통됩니다. 그러니까 1919년엔 서울에서 동쪽의 원산, 서쪽의 인천, 남쪽의 부산, 북쪽의 신의주까지 연결됐고 이 철도망은 독립선언문의 지역 배포에 중요한 수단이 됐습니다.

 

  • 경원선만 살펴볼까요? 경원선의 주요 역은 용산-의정부-철원-평강-원산이고 총길이는 223km에 달합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 포인트. 철원과 평강, 원산 같은 경원선의 강원도내 주요 역들이 하나같이 만세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강원도의 만세운동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Chapter 6. 강원 영서지역의 만세운동

 

  • 철도가 핵심 역할을 했다면 독립선언서를 일찍 확보한 영서 북부지역이 가장 빠르고, 영동 남부지역은 많이 늦어야 하지만 실제로 강원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의 만세운동은 시기적으로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건 3월 1일 대대적인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와 검문이 강화되며 독립선언문 배포 과정에 많은 지역 지도자들이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다만 영서와 영동지역 모두 북부에서 남부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 ‘강원도의 항일독립운동사’라는 책엔 강원도내로 독립선언문이 유포되는 과정이 소개되는데요. 최초 인쇄됐던 2만 1천 부의 독립선언문 가운데 2천 부가 강원도와 함경도 몫으로 서울의 천도교도 안상덕에게 맡겨집니다. 안상덕은 2월 28일 경원선을 이용해 원산으로 가다가 중간에 평강역에 내려 평강부 천도교구장 이태윤에게 700부를 전달한 뒤 원산으로 떠납니다. 이태윤은 철원에 170부, 화천에 90부, 김화에 60부, 통천에 32부, 회양에 88부, 이천에 15부, 춘천에 150부를 전달하기로 합니다. 

 

  •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수일 안에 강원도 전역에 독립선언서가 퍼졌어야 하지만 3.1만세운동 이후 삼엄해진 감시 탓에 쉽지 않고 실제로 지역의 많은 지도자들이 붙잡히고, 독립선언서를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곧바로 만세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시기적으로 차이가 없어졌고, 다시 말하면 3월 1일로부터 한 달 이상 뒤에 만세운동이 이어지는 상황으로 연결된 겁니다. 

 

  • 지역의 지도적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민심이 더 격앙됐고 공식적으로 3.1운동 지도자들의 계획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도내 처음으로 배부된 평강에서는 3월 25일과 4월 5일, 4월 7일에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 그런데 철원에선 이보다 보름 앞선 3월 9일에 도내 최초로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그 이유를 역사에선 경원선 철도 개통으로 철원역이 생겨 서울의 정보가 빨리 전달됐고 천도교의 기반이 강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듭니다.

 

Chapter 7. 강원도 전역에서 만세운동 전개

 

  • <시.군별 만세운동 시작일>
  • 철원 3월 9일
  • 김화 3월 12일
  • 간성군 3월 17일
  • 화천 3월 23일
  • 평강 3월 25일
  • 횡성 3월 27일
  • 원주 3월 27일(부론면)
  • 춘천 3월 14일 계획했다 무산되고 27일 만세운동(기록에 따라 3월 7일 춘천농공에서 있었던 학생만세운동을 도내 최초 만세운동으로 보기도 함)
  • 인제 3월 28일 계획했다 무산
  • 홍천 4월 1일 500여 명 만세운동.
  • 정선 4월 1일
  • 통천 4월 2일.
  • 강릉 4월 2일. 
  • 양구 4월 3일
  • 이천 4월 4일
  • 양양 4월 4일
  • 평창 4월 4일 만세운동 계획했지만 무산. 
  • 울진 4월 11일
  • 회양 4월 14일
  • 삼척 4월 15일
  • 영월 4월 21일

......

  • 5월 9일 양양 만세 시위가 마지막으로 기록.

 

Chapter 8. 고성(간성)의 만세운동

 

  • 지금의 고성은 1919년 3월 당시엔 간성군이었습니다. 1919년 5월 10일에 고성군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원선의 종착역인 함경도 원산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만세운동이 일찍 일어납니다. 당시 신북면 계월리 청년 김동원이란 분이 독립선언서 한 부를 입수해 3월 13일 고성면사무소 등사기를 이용해 50매를 만들고 3월 14일 길에 뿌리거나 붙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일로 붙잡혀 징역 10월형에 처해집니다. 또, 당시 간성의 한영서원 학생 이동진이 독립운동 선전문을 작성해 간성보통학교에 뿌려 만세운동을 촉구했고 여기서 자극받은 간성보통학교 학생들이 앞장서 3월 17일 간성 장날에 전교생 150명이 운동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칩니다. 이동진은 경찰에 붙잡혀 징역 6월에 처해지고 간성시장은 4월 17일까지 한달 동안 폐쇄됩니다.

 

  • 간성군의 3.1 만세운동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요. 고성군 향토사연구소 김광섭 위원이 고성문화원과 함께 지난해 ‘고성의 독립운동사’를 발간했습니다. 하지만 500만 원의 적은 예산으로 힘든 작업을 한 김 위원은 이 책을 만들면서 눈이 크게 나빠져 다음 주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고성 청간정에서 김광섭 위원을 만나 인터뷰를 나눴습니다.

 

  • 김광섭 고성 향토사연구위원 인터뷰

“3월 17일이죠. 장날을 기점으로 했어요. 간성보통학교에서 시발이 돼서 장날 퍼졌다고 하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흔히 얘길 해요. 먹고 살기도 바빴다. 풀하고 나무껍질을 먹을 정도로 식량 부족이나 어렵다 보니까 독립이나 항쟁을 하기 위해선 역부족이지 않았나 그래서 해방 이후, 6.25 끝난 이후 최우선시 해야 될 것을 좀 소홀히 한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제가 늦게나마 2018년도에 지역의 86명이란 인물을 정리하게 된 것을 개인적으로 무궁한 영광이라고 생각하죠.”

 

Chapter 9. 정선의 만세운동

 

  • 정선에서도 천도교도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준비되는데 이미 3.1운동이 발발한 지 한 달 가까이 지나면서 천도교인들에 대한 일제의 통제가 삼엄해지죠. 정선에선 3월 23일 평창군 대화면의 농민 최상달이 정선군 동면 화암리의 손호국의 집에서 유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만세운동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최상달이 사전에 체포되고 독립선언서를 일제에 빼앗겨 시위로 이어지진 못합니다. 이후 정선에선 정선 성당이 만세운동 계획을 세우는 핵심 역할을 합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정선지역 지도자들은 4월 1일 장날을 거사일로 잡습니다. 이날 정선 성당을 나와 지금의 아리랑공연장 주변의 장터를 돌며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만세운동을 벌이는데 수백 명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또, 각 지역에선 산에 불을 놓고 만세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정선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와 함께 의병들의 활약이 컸다고 하는데요. 정선에선 지난 2012년 김영윤 향토사연구위원이 ‘정선의 3.1운동과 의병활동’이란 논문을 써서 정선문화원의 ‘정선 문화’ 2012년 제15호에 실렸습니다. 김영윤 위원을 정선 성당에서 만나 인터뷰를 나눴습니다.

 

  • 김영윤 정선 향토사연구위원 인터뷰

“여기는 정선 천주교 성당이고요. 1919년 3월 20일 정도에 독립선언문이 입수가 돼서 천도교인을 중심이 돼서 만세운동이 시작됩니다.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제 일경에 발각이 되거나 그러면 모진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숨어서 이동했던 걸로 문헌상에 조금씩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1919년 4월 1일에 시작이 돼서 시내 농협 앞으로 해서 현재 공설운동장 이쪽에서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합니다. 나전, 여량, 임계를 거쳐서 동해, 삼척으로 이동을 한 걸로 나오고 있습니다. 1919년 4월 1일에 시작된 이유는 정선지역의 시장 날짜가 2일 장날입니다. 그때 당시엔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 시장을 보러 왔기 때문에 사람을 모아서 하기가 좋았던 걸로 문헌상 나오고 있습니다.”  

 

Chapter 10. 강릉의 만세운동

 

  • 강릉에선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독립선언서 입수 경로에 대해 기록이 좀 달랐는데요. 지난 2010년 출간된 ‘강릉지방 항일독립운동사’라는 책에서는 유림의 고장답게 고종의 인산에 초당리에 살던 최돈옥과 경포의 조병칠 등 유림 10여 명이 참여했다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이를 숨긴 채 도보로 강릉으로 와 전달하면서 지역의 만세운동 준비가 시작된 것으로 결론내렸습니다.

 

  • 강릉에선 4월 2일에 첫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당시 두 갈래의 준비가 있었는데요. 지금의 ‘강릉초등학교’인 당시 ‘강릉공립보통학교’의 김춘경 교사와 주동자 이명의가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만세운동을 기획하지만 같은 반 학생의 밀고로 무산됩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이 4월 1일 장터에 나가 만세를 불러 이튿날 벌어진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됩니다. 또 한 갈래는 유림들이 만든 ‘유도진흥동지회’와 강릉청년회, 강릉감리교회가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준비했고 강릉감리교회, 그러니까 지금의 한국은행 맞은 편 대형 상가 자리인데요. 교회 지하에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해 2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합니다. 하지만 전날 강릉보통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검문이 강화돼 아침이 아닌 오후 4시경에 만세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이날 운동을 주도한 최선재와 조대현은 징역 10월, 최선근은 징역 6월, 최돈옥, 김진숙은 징역 4월을 선고받았습니다.

 

  • 4월 4일엔 초당리의 창동회가 주도하고 많은 농민들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매년 모내기철에 초당, 송정, 포남, 운곡, 옥천의 5개 마을 농민들이 모여 강릉남대천 물을 농업용수로 끌어오는 준비를 하는데 이날 만세운동을 벌인 겁니다. 이날 참여자가 400여 명이고 20여 명이 체포됐다고 하니 큰 규모였습니다. 이날 검거된 최진규, 최이집은 징역 4월, 최영방, 박장실, 김봉공은 태형 90대에 처해집니다. 강릉에선 4월 5일, 7일, 8일 계속 만세운동이 펼쳐지는데요. 최근중 광복회 영동북부지회장에게 들어봤습니다.

 

  • 최근중 광복회 강원영동북부지회장 인터뷰

“독립선언문을 입수해서 강릉으로 돌아와 다시 유도진흥회 동지들과 만세운동을 계획했죠. 여기에 감리교회에 있는 안경록 목사와 교회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도 인쇄하고 임당동에 일번지 상가 있죠. 그 자리가 감리교회 자리예요. 유도진흥회 주역들이 여남은 사람이 모여서 감리교회 청년회도 합세하고 4월 2일 장날을 기해서 했고. 초당동 창동회라는 모임이 4월 4일을 보 수축 공사를 하는 날로 정해서 지금 택시부광장 거기가 장터니까 거기까지 오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러니까 모인 장소에 도달해서 선창부와 후창부, 해산 방지부 이렇게까지 조직을 완전히 해서 작업하던 괭이와 쇠스랑, 가래 이런 걸 그대로 들고서 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시작했죠.”

 

Chapter 11. 양양의 만세운동

 

  • 양양의 3.1 만세운동은 도내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격렬했으며, 가장 많은 피해를 남겨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대중적 독립운동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양양도 역시 독립선언서가 지역 안으로 유입되는 두 갈래를 통해 만세운동이 계획됩니다. 첫 번째는 유학자인 이석범이 고종 인산에 참례하고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와 당시 ‘쌍천학교’ 졸업생들과 지금의 양양초등학교인 ‘양양보통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합니다. 

 

  • 또 한 갈래는 양양감리교회를 축으로 한 기독교계의 준비였습니다.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 학생이던 조화벽이 만세운동 뒤 독립선언서를 버선에 숨겨 양양으로 들어와 당시 양양교회의 김필선에게 전달해 양양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됩니다. 조화벽은 유관순 열사의 친오빠의 부인입니다. 이 조화벽 여사와 가족들이 양양에 살았고, 지금도 일부 친인척들이 살고 있습니다. 김필선은 교회 청년들과 4월 4일 양양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는데 4월 3일 기독교계와 유교계가 임천리에서 만나 통합 추진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4월 3일 양양군수 이동혁과 일제 관헌들과 함께 임천리 주거지를 급습해 태극기를 압수하며 22명을 체포하는데 이때 일부 인사들이 무사히 피신해 계획대로 진행됩니다.

 

  • 4월 4일 예정대로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특히, 임천리에서 체포된 22명을 석방하라며 양양경찰서로 몰려가 함성을 지르는데 손양면 가평리 함홍기 등이 경찰서장에게 항의하다 화로를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서 칼에 맞아 숨집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은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게 됩니다.

 

  • 또, 4월 5일엔 물치, 7일엔 현북면에서 독자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9일에는 천여 명이 모여 양양 장날에 양양읍에서 대규모 시위를 하기로 하고 양양읍 방면으로 몰려갑니다. 하지만 당시 주재소 옆에 진을 치고 있던 일제 헌병과 군인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그 자리에서 만세를 외칩니다. 하지만 일제 경찰과 군인들은 군중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그 자리에서 9명이 숨집니다. 당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져 9명이 희생된 이곳, 현북면 기사문리엔3.1 만세운동 유적비와 9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당시 상황이 기록돼 있습니다. 처절했던, 그리고 가슴 아픈 이날의 역사에 대해 양양 향토사연구소 이철수 소장과 양양문화원에서 만나 인터뷰를 나눴습니다.

 

  • 이철수 양양 향토사연구소장 인터뷰

“지역의 유림 대표인 이석범 선생께서 고종 인산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숨겨서 돌아왔어요. 그게 3월 20일경인데. 4월 4일부터 각 마을에서 대표들이 인솔해서 태극기를 만들어서 양양시장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하고. 오후에 경찰서에 와서 죄 없는 사람들 왜 잡아갔느냐 항의 중에 가평리에 있는 구장을 하는 함홍기란 분이 화로를 들고 경찰서장한테 던졌는데 옆에 있던 순사 둘이 칼을 뽑아서 목을 치고, 팔을 치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양양시민들이 더욱 흩어지지 않고 만세운동을 벌이고 그랬어요. 계속 이어지다가 4월 9일날 현북면 거기서 주재소에 가는데 일본 경찰과 헌병은 무기를 가지고 기다리다가 조준 사격을 한 거죠. 그 자리에서 9명이 사망했어요.”

 

Chapter 12. 삼척의 만세운동

 

  • 삼척에선 4월 14일에야 지금의 삼척초등학교인 ‘삼척보통학교’ 학생 김달하등이 재경유학생 김순하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교사 김기덕의 지도로 만세운동을 계획합니다. 이튿날 전교생 176명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외칩니다. 하지만 헌병이 출동하면서 만세운동은 외부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났고, 주동자 4명이 체포됐습니다. 하지만 삼척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날은 삼척김씨 시조의 춘계존사일, 그러니까 봄철 큰 제사를 모시는 날이었는데 삼척읍 남쪽 묘소에 3백여 명이 모여 있다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했다 일제 헌병의 출동으로 해산하기도 했습니다. 또, 지금의 동해 송정초등학교인 북삼면 송정보통학교에서 16일 만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삼척보통학교 만세운동에 대해 심영곤 삼척 4.15 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과 삼척초등학교에서 만나 인터뷰를 나눴습니다.

 

  • 심영곤 삼척 4.15 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인터뷰

“삼척보통학교 출신 김순하라는 학생이 재경유학생 중에 있는데 독립선언서를 입수해서 신발 밑에 숨겨서 재학생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면서 4월 15일에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지게 됐습니다. 기념사업회에선 매년마다 노선배들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고, 시민들에겐 애국심을 함양시키고, 청소년들에겐 역사의 현장을 산교육의 장으로 만들어서 청소년들에게도 나라 사랑하는 정신을 고취시키고 우리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이런 산교육의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앞으로도 100주년을 기념해서 저희들이 부족한 사료를 더 많이 모집해서 좋은 책자를 마련해서 후세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Chapter 13. 영동지역의 항일 정신 되새겨야

 

  • 오늘 긴 시간 동안 강원 영동지역을 중심으로 강원도의 3.1 만세운동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영동지역은 항일 독립운동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하지만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점과 당시 일을 증언해주실 독립유공자들의 이미 돌아가셨거나 연로하시다는 점,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는 점이 많이 아쉬운 상황입니다. 양양군과 강릉시는 비교적 자료가 남아 있는 편이지만 고성이나 삼척, 정선은 그렇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실제로 어제죠. 20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지역별 1919년 항일운동 기록을 정리해 공개했는데 정선의 만세운동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기존 사료가 많이 부족하다는 뜻일 겁니다. 양양이나 강릉도 영동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서 자료가 많다는 겁니다. 작년에 고성에서 500만 원의 저예산으로 200쪽이 채 되지 않는 ‘고성의 독립운동사’가 나왔고, 정선에선 아직도 논문 한 편이 고작일 정도고, 삼척에선 아예 관련 책자 한 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 이런 사료 정리뿐 아니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영상이나 음성 기록도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기억에만 의존하는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게 마련이니까요. 오늘 긴 시간 영동지역의 3.1만세운동 역사를 살펴봤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엔 ‘영동지역의 3.1운동’두 번째 시간으로 ‘3.1운동 100년, 오늘의 영동지역은?’을 주제로 얘기해볼까 합니다.

 

  • 지금까지 발꿈기 마흔세 번째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