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즈음 고향인 가평 하색리를 다녀옵니다.
너무 일찍 떠나신 어머니와 불편하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보다 더 애틋하게 보살펴 주셨던 댁에, 과일 한 바구니를 들이밀며 면목없음을 대신합니다. 다행이 고령임에도, 아직 반주 한 잔 마다치 않으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걸진 입담이 예전과 다르지 않아 그 흑백시절의 이야기에 한참을 웃다 돌아옵니다.
마을을 나오며 차창을 내리고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아니, 냄새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많이... 한동안 되새김질 해야 할 고향의 냄새를.
오히려 가난 하지 않은 게 이상했던, 모두가 가난해 가난인 줄 모르고 살던 이들이 노을을 등지고 도랑물로 땀을 씻고 나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 오릅니다. 안개처럼 퍼지는 매캐한 연기엔 그날 저녁거리의 냄새가 묻어 있지요. 시골찬이 거기서 거긴지라 혹, 뉘 집에서 기름진 비릿내가 풍기면 여지없이 동네 어른들의 술판이 벌어지곤 합니다. 월남전에서 아저씨가 돌아오지 않아 홀로 아들을 키우던 재실이 아줌마의 눈물젖은 미아리 고개... 지금 생각해 보면 흡사 브레이크댄스를 연상케하는 석주아저씨의 꺽기춤... 백발을 곱게 쪽진 순업이할머니의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장터를 떠돌다가 가끔 집을 찾으시던 남귀삼춘의 공중제비... 때론 모깃불을 피우고 때론 화롯불에 모여 앉아 하하호호, 허허껄껄 웃으시던 이들은 이제 아무도, 아무도 계시질 않습니다.
소, 돼지, 닭, 강아지, 염소, 오리가 사람보다 많고, 남의 집 부엌에서 삶아놓은 고구마를 집어먹고, 장독에서 장을 퍼 와도 그 누구도 뭐라하지 않던 곳.
몸이 아파 종일 작은 바위에 앉아 볕바라기를 하던 종덕이를 놀리며 메뚜기,가재, 개구리, 참새, 밤,자두,오디,다래를 잡아먹고 따먹고 다니던 내 친구 봉문이, 기열이, 왕철이. 남자만 넷이 사는 집에 가끔 들어와 아무렇지도 않게 청소를 해주고 빨래를 해주던 열여덟 명옥이누나. 열네살이 된 나에게 누렇게 변색된 헤세의 '데미안'을 건네던 옆집 경숙이누나... 그들과 수줍게 찍은 흑백사진은 온 데 간 데 없고, 이제는 길에서 마주쳐도 모를 만큼의 염치없는 세월을 살아 왔습니다. 딸이없어 딸처럼 키운다고 사과머리를 묶고 분홍색 옷을 입혀놔도 맨날 '헤헤' 거리던 조상사집 막내아들의 삶은, 그 염치를 눙칠만한 알리바이를 만들지 못한 채, 장마철 흙탕물 위를 떠가는 스치로폼 마냥 흐르고, 걸리고 막혀, 돌아 떠 내려 왔지만... 그래도 가끔은 샤넬이나 디올의 향수보다, 시트러스 라벤더 디퓨져보다, 바닐라 헤이즐럿 커피보다 향그러운, 그 흑백시절, 아련한 내 유년의 냄새가 그립습니다.
한겨울 쨍한 아침냄새, 구수한 여물 끓이는 냄새, 아궁이에서 탁,탁, 거리던 솔방울냄새, 이끼낀 뒷곁의 쾌쾌한 툇마루냄새, 산바람이 부드러워지면 솟아 오르던 달달한 봄흙냄새...
그리고 사람들,
그 사람들 냄새...
-- 이동원, 박인수 '향수'
** 명절에 고향 찾으시는 오발 가족분들 푸근하고 행복한 고향냄새 듬뿍 담아 오시길 바랍니다. 길 조심 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