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아주 잘 알고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그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었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가 미워졌다
아직 조심스럽긴 하지만 삼우제도 마쳤으니, 입을 떼도 되겠지요...
8년 전 봄바다를 더욱 파랗게 물들였던 소년,소녀도 돌아올 기약이 없고, 석달 전 반지하 창살 사이로 햇빛보다 빗물을 먼저 들인 가족도 이제는 너무 높은 곳으로 올라 갔는데, 20여일 전 빵공장에서 꿈을 찾다 꿈과 함께 사라진 청춘도, 닷새 전 끓던 심장이 순식간에 식어버린 청춘들도, 개구진 웃음만 남긴 채 떠났습니다.
계속되는 사회적 참사에 '사고'란 말은 가당치 않습니다. 사망자 숫자로 사건의 대,소를 구분 짓는 자들에게도 치가 떨립니다. 누굴 탓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려했으나, 말 그대로 '수습'하려는 이들의 말과 글은 자꾸 담배를 물게 만듭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는 '슬픔의 메뉴얼'이 존재 하는 것 같습니다. 경험치로 발휘되는 그 '오차없는 애도의 일사불란함'이 저는 너무 소름끼치도록 무섭습니다. 절차를 마친 우리는 더욱 단단해진 양심으로 미소의 눈치게임을 시작하겠지요. 게임운이 없는 전 이번에도 꼴찌겠군요.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잊힌다는 말은, 우리같은 주변인 얘기구요, 피붙이들에겐 한달 후, 1년 후, 10년 후, 그 웃음소리와 그 골목을 비추던 시린 가로등이 근접사진처럼 더욱 더 선명해 지기도 한답니다. 문득문득 아침햇살이 낯설고 불현듯 그 빈 방의 인기척에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겠지요.
하여, 싱거운 농담처럼 죽음이 일상으로 스밀 때, 나의 생존이 한낱 즉석복권의 행운처럼 가벼운 것임을 느낄 때, 영문도 모른 채 사라져 간 이들의 이름을 저는 기억하려 합니다. 그들의 이름위에 내가 아는 이들의 이름을 꾹꾹 눌러 적으며 기억하려 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얘기할 것이고, 여행을 하며 손잡을 것이고, 술을 마시며 건배할 것이고, 습관처럼 웃으며 슬퍼할 것이고, 괜찮다 할때 안아줄 것이며, 이제 그만 잊으라 할때... 더욱 또렷이 기억할 것입니다.
나 대신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허망하게 떠난 이들의 죽음과 고통의 족쇄에 발묶여 평생 힘겹게 걸어가야 할 가족들의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 거기에 빚진 , 지금 웃고 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가족분들, 친구분들, 제발 자책하지 마시길, 제발...
- 비틀즈 <헤이 쥬드>